
저는 박훈정 감독을 신세계 이후로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녀1과 마녀2를 보면서 개연성 파괴와 너무 많이 뿌려진 떡밥들이 회수되지 않아 실망했던 터라, 폭군 드라마 소식을 접했을 때도 바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정주행을 끝내고 나니 다시 한번 박훈정 감독에게 기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녀 시리즈로 실망했던 저에게 폭군은 여러 부족한 부분이 보완된 작품이었고, 특히 캐릭터 구축이 탁월했습니다.
폭군이 마녀보다 나은 이유, 캐릭터 매력
폭군의 가장 큰 강점은 캐릭터를 아주 잘 살렸다는 점입니다. 차승원이 연기한 임상은 평소엔 친절하고 어눌하지만 임무 시에는 뛰어난 킬러로 돌변하는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이런 캐릭터 설정을 '이중 페르소나(dual persona)'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페르소나란 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인격을 드러내는 심리적 특성을 의미합니다. 차승원은 이 설정을 자신만의 연기로 완벽하게 소화해냈고, 진부할 수 있는 킬러 캐릭터를 새롭게 만들어냈습니다.
김선호가 연기한 최 국장은 국정원 국장이자 폭군 프로그램 운용자로, 드라마의 모든 사건을 촉발시키는 인물입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의 극단적인 애국자적 면모였습니다. 강약약강을 가리지 않고 선배들을 깔아뭉개며 국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면서도 섬뜩했습니다. 김선호는 대사 호흡과 표정, 말투로 젊은 엘리트이자 극단주의자의 양면을 탁월하게 표현했습니다.
고윤정의 최자경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중 인격 설정과 강력한 전투력으로 유치함을 완전히 상쇄시켰고, 후반부 액션 신에서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줬습니다. 솔직히 저는 마녀 시리즈에서 액션이 다소 어설프다고 느꼈는데, 폭군에서는 모션 캡처 기술과 스턴트 코디네이션이 훨씬 정교해졌습니다. 여기서 스턴트 코디네이션이란 배우의 동작과 스턴트맨의 액션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마녀와 폭군, 같은 세계관이지만 다른 프로젝트
폭군은 마녀 시리즈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강화 인간 프로젝트를 다룹니다. 마녀는 미국 주도의 서양 버전 프로젝트이고, 폭군은 한국 자체 개발 동양 버전 프로젝트입니다. 마녀 프로젝트는 미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을 포함한 해외 지사에서 진행되었고, 한국의 2세대 강화 인간이 바로 마녀 1편의 김다미였습니다(출처: 네이버 영화).
미국의 프로젝트 폐기 명령으로 한국에서도 제거 작업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마녀 1편의 주요 배경이었습니다. 반면 폭군 프로그램은 최 국장이 주도한 국내산 프로젝트로, 미국산 마녀 프로젝트에 대항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미국은 당연히 이를 허락할 수 없었고, 헤드원 세력인 폴을 중심으로 제거 임무가 투입됩니다.
개연성과 디테일이 중요한 저에게는 마녀에 나왔던 배우가 폭군에서 다른 역할로 나온 부분이 불편한 요소로 작용한 것이 사실입니다. 같은 세계관이라고 하면서 동일 배우를 다른 역할에 캐스팅한 건 세계관 연결성(narrative continuity)을 해치는 요소입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연속성이란 하나의 이야기 우주 안에서 모든 요소가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고 봤을 때, 두 프로젝트를 구분한 설정 자체는 참신했습니다.
폭군 드라마의 결말에서 임상은 강에 빠져 제3의 종족에게 끌려가고, 최자경은 폭군 샘플을 주입받아 강화 인간이 됩니다. 차승원의 인터뷰에 따르면 임상은 실험을 통해 능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시즌 2가 나온다면 강화 인간 최자경과 실험체 임상의 대결 구도가 중심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시즌2 전망과 박훈정 감독에 대한 기대
폭군은 국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 후속작 제작 가능성이 높습니다.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는 글로벌 시청률과 화제성을 기준으로 시즌 연장을 결정하는데, 폭군은 이 두 가지 지표를 모두 만족시켰습니다(출처: 디즈니플러스). 제 경험상 박훈정 감독의 작품은 후반부로 갈수록 속도감이 붙으면서 몰입도가 높아지는 편인데, 폭군도 중후반부의 빠른 전개와 시원시원한 액션이 재미를 더했습니다.
향후 스토리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마녀, 그리고 폭군 최자경과 임상 등의 대립 구도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에필로그에서 자경의 눈이 검은색으로 변하는 모습이 비춰진 건 어릴 적부터 실험을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런 복선 회수 방식을 '플래시백 복선(flashback foreshadowing)'이라고 하는데, 과거 장면을 통해 현재 캐릭터의 비밀을 암시하는 서사 기법입니다.
솔직히 저는 마녀1과 마녀2를 보면서 개연성 파괴와 회수되지 않은 떡밥들로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폭군을 보고 나서는 박훈정 감독이 그간의 피드백을 반영해 스토리텔링을 개선했다는 걸 느꼈습니다. 물론 동일 배우를 다른 역할에 캐스팅한 부분은 여전히 아쉽지만, 이를 제외하면 폭군은 마녀 시리즈보다 훨씬 완성도 높은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팬으로서 마녀3와 폭군2가 제발 잘 나오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박훈정 감독은 액션과 캐릭터 연출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지만, 스토리 구성에서는 가끔 옥의 티를 보입니다. 폭군에서 보여준 개선된 모습처럼, 앞으로도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주길 기대합니다. 만약 폭군 시즌2가 나온다면 1화부터 속도감 있게 시작해서 마녀 세계관을 모르는 시청자도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친절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